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청년의 소지품 사진을 보고 참 먹먹해졌다. 19살이라던데.

육개장 사발면과 나무 젓가락. 그리고 이것들이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닌 걸 보여주는 스테인레스 숟가락.

소지품 사진을 찍은 사람은 그냥 모아서 찍느라고 그랬겠지만

컵라면 위에 얹혀진 나무 젓가락과 뒤집어진 숟가락은 꼭 제사상의 그것같아 더욱 슬펐다.

슬프다는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목구멍이 따가운 아픔과 분노의 어떤 것쯤.

 

누군가의 불행을 나의 무탈한 일상에 비교하는 것은 꽤 역겨운 일이지만 그래도 무릅쓰고 해보자면.

 

우연히 지난 주에 아주 오랫만에 컵라면을 먹다가 내게 컵라면은 즐거운 맛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집안이 별로 면 종류를 좋아하지 않고 컵라면은 더더욱 먹을 일이 없다. 그냥 라면도 아니고 컵라면 특유의

맛이 그리워 먹는 날은 일요일의 간식이거나 아주 가끔 그 맛이 생각날 때다. 지난 주 금요일 밤에

몇 달만에 컵라면을 먹으며 컵라면에 대한 내 이미지는 친구와 특별한 곳에 놀러갔을 때나 도서관(그렇지만

치열한 공부는 아니고 친구와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이나

혹은 해외여행 이런 이미지로 모아지는 것을 떠올리고, '뭐야 컵라면 내 안에서 꽤 괜찮은 지위로군.' 하고

감탄했었고 블로그에 끄적여볼까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뉴스를 본 앞으로는 그럴 수 없지만.

컵라면에 대한 달콤한 정의를 내린지 겨우 며칠이 되지 않았것만, 이제 내 안에서 컵라면은

그 따뜻한 개인적 기억만큼, 거대하고 무능하고 악한 시스템안에서 스러진 사람에 대한 기억 역시 떠오르게 할 것이다. 

 

내 경우 지루하고 바쁜 노동의 허기를 달래준 음식을 떠올린다면 삼각김밥이다. 매일 아침 엄마가 차려주는 거한 아침상을 받다가 아침에 일어나 출근길에 들러 짧은 순간 최선을 다해 고민해 집어들고 회사에서

누가 볼까 혹은 택시안에서 냄새날까 신경 쓰며 허겁지겁  먹던.

 

삼각김밥 하나는 늘 부족했다. 음식의 질을 떠나 그 19세 남자애에게 컵라면 하나는 또 얼마나 부족한 양이었을까.

 

그래도 그렇게나 편의점 많은 서울인데 잠깐 편의점 들러 컵라면에 삼각김밥 음료수 정도 먹을 짬도 없었단 말인가. 물론 저것이 충분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상적인 식사시간과 식사의 질(식대)를 확보해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얼마나 시간을 안 주었기에 컵라면을 휴대해야 하는 건가. 도대체 사람을 인력을 어떻게 부린 것일까. 어떤 화물기사님의 차에 기름넣을 때만 쉴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짬이 없었겠지. 열심히 바쁘게 했겠지.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기름을 넣어주지 않아도 쉬지 않아도 멈추지도 과열되지도 않고어쨌든 단기적으로는 계속 움직인다. 비닐봉지에 넣어 둘둘 말지도 않고 덜렁 덜렁 연장들과 함께 넣어진 숟가락.

 

그냥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좀 더 교할한 자들에게 당하거나 남 좋은 일만 시키거나 좀 억울하고 속터지거나 못살거나 그냥 그런 정도인줄 알았는데 이 나쁜 시스템에서는 그냥 죽게 된다. 이 시스템에 따르면 죽고 나서 보상도 못 받게 되어있다.

 

이유없이 죽임을 당하고 성추행을 당하는 여자들이, 커다란 검은 손에 엉덩이가 만져져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표정을 짓는 젊고 연약한 여자의 삽화를 미리 보기로 넣어 클릭수를 높이는 기사감으로 소비되고. 공포에 질려 외쳐도 비웃음만 당하는.

 

여자아이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날.

 

2016년. 한국. 내가 살았고 앞으로도 살.

 

기억해야지. 잊지말아야지.

 

 

고인의 아니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알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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